고전 소설을 읽을 때면 늘 그런 기분이 든다.
내가 살지 않았던 그러나 묘하게 익숙한 시간 속으로 잠시 스며드는 느낌.
소설의 글자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영화 한 편을 통째로 머릿속에 띄워두는 것에 가깝다.
사실 나는 그동안 에세이 위주의 독서를 더 선호한다고 스스로를 여겼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특히나 올해는 그런 생각이 조금 변해갔다.
나는 해외 고전 소설인 <스토너>,<데미안>,<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마음 깊숙한 곳이
저릿해지는 경험을 자주 했다.
그러다 이번 여름엔, 밀리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책 한권을 발견했다.
바로 20주년 기념으로 표지도 새롭게 개정되어 나왔고, 전자책으로도 바로 볼 수 있었다.
그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할 은희경 작가님의 <새의 선물>이라는 소설이다.
제목, 표지색부터가 여름과 참 잘 어울린다.
읽는 내내 마치 우리 엄마의 어린 시절, 그 오래된 골목과 사람들의 숨결을 함께
걷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시점이 "진희"라는 인물의 시선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나와 내 조카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며 상상했다.
특히 이모를 바라보는 진희이 시선과 그 묘사가, 묘하게 지금의 나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달까.
그래서인지 이 책이 더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밑줄을 그으며 오래도록 곱씹고 싶은 깊이있는 문장이 특히 많았다.
그 중 몇 구절을 여기에 함께 기록해본다.


소설 <새의 선물>에서 밑줄 친 문장들....
"절대 믿어서는 안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우고 있었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죽을힘을 다해 벌레가 내게 강요하려던 징그러움에 저항한 나는 벌레의 의도대로는 되지 않았다는 점 떄문에
어쨌든 성취감도 조금 맛보았다.
그런 생각은 내가 할머니의 적자이고 이모는 서자 닽다는 느낌을 주면서 정통성을 확보한 나에게 우월감을 심어주었다.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첫인상에 서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모의 얼굴은 이모의 삶에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가만히 보면 할머니는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휴식에 들어가는 그 시간의 시작을 양말을 벗는 것으로부터 출발시키는 것 같다.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이야깃거리일 뿐이지만 착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그것은 비극이 되기 때문이다.
실없이 "친한 척"과 "어른 행세"를 동시에 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를 못 본 척 고개를 숙이고 일부러 그늘을 피해 퇴약볕 아래로만 해서 집으로 간다.
사연이 있다 한들 어쩌겠으며 또 그 사연 안에서 혜자 이모가 악역을 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막연하게 믿어주는 것이
한 지붕 식구끼리의 정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헤어짐이야말로 추억을 완성시켜 준다. 현석 오빠와 완전히 헤어짐으로써 내 첫 키스라는
추억의 박제는 완성되었다.
내가 알기로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줄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확실한 생각을 말하는게 아니라 언제나 "생각죽인 생각"까지를 입 밖에 내는 것이 이모의 버릇이었다.
청순한 이미지 하나를 잃음으로써 이모의 순수함은 유치함으로 전락되며 진실함은 거머리 같은 아둔함으로 이형령을 짜증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미운 정"의 깊이까지 가지 못하고 "고운 정"에서 끝나 버리는 숱한 풋사랑의 파국이기도 하다.
절망 이후 이모의 선택은 체념뿐이었으며 내키는 대로 삶에 대해 응석을 부리며 살아온 이모에게는 체념응ㄹ 알아가는 과정이 일종의 탈태였다. 이모는 번데기의 태를 벗어버리기 위해, 생전 처음 자기의 존재와 싸우고 있는 거였다.
이 책은 정말 여름과 잘 어울린다 싶다.
나에겐 여름을 상징하는 여러 이미지가 있는데,
그래서 여름마다 펼쳐드는 몇가지 정해진 책이 있다.
그 책을 매년 여름에 읽으며, 늘 다른 구절에 마음이 꽂힌다.
무튼 앞으로는 새의 선물도 추가될 예정이다.
서늘한 바람과, 나른한 햇살, 어딘가 짙게 깔린 쓸쓸한 그런 이미지들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정통고전이라기 보단, 현대문학인 작품이다.
90년대 한국 사회와 우리의 엄마, 할머니 세대의 내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질감없는 우리 곁의 이야기다.
이 여름이 지나가기 전에, 시간내어 꼭 읽어보시길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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